몇 년 전이었나,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 작은 레스토랑에서 레드 와인을 주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상온에서 보관하던 와인인지 온도가 너무 높게 느껴졌다. 온도를 좀 낮추고 싶어 아이스 버킷을 요청했더니 직원이 근엄한 표정으로 ‘손님, 레드 와인은 원래 상온에서 마시는 겁니다.’라고 알려주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직원과 언쟁까지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날 이 더워서 좀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는 말로 결국 아이스 버킷을 얻어 내긴 했지만, 아이스 버킷에 얼음을 채워 온 직원의 썩소를 머금은 애매한 표정은 결국 그날의 와인 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 직원 말대로 레드와인은 꼭 상온, 그러니까 현재의 기온과 같은 온도로 마셔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사막한가운데에선 체온보다 높은 미지근한 온도의 레드 와인을 마셔야 한다.

한겨울 알래스카의 이글루에서 와인을 즐기려면 아이스 버킷에 담가 놓은 화이트 와인보다 더 차가운 레드와인을 마셔야 정상이 된다.

그렇다면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셔야 한다는 상식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닐까?

 

사실 이런 것은 상온의 정의를 착각해서 생기는 오해다. 포털사이트에서 상온(常溫, ordinary temperature)을 검색해 보면 20±5°C정도의 온도를 뜻한다. 상온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실온(室溫, room temperature) 또한 인간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온도로, 상온과 유사한 범위의 온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시라’는 말은 ‘20°C 정도에서 마시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지금 현재 당신이 있는 곳의 온도와 동일한 온도에서 마시라는 얘기가 아니다. 와인 전문가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레드 와인의 적정 음용온도는 대략 15°C에서 20°C 정도라는데에는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레드와인이 너무 차가우면 타닌의 떫은 느낌과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며, 향과 맛 또한 화사하게 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시큼한 맛이 강해지는데다 흐물흐물하게 퍼진 느낌이 들어 제맛을 느끼기 어렵다.

이런 점 때문에 타닌과 산미의 정도, 바디 등 스타일에 따라서 적정 음용 온도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피노 누아(Pinot Noir)나 바르베라(Barbera) 등 산미는 높고 타닌이 적으며 미디엄 바디 정도의 가볍고 생기 있는 레드 와인은 15-16°C의 비교적 낮은 온도가 적당하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메를로(Merlot), 말벡 (Malbec)등 미디엄 풀 바디 이상의 타닌이 많고 강건하며 묵직한 레드 와인은 보통 17-19°C 정도로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더운 여름날 셀러나 냉장고가 아닌 상온에서 보관한 와인의 온도는 어떨까? 당연히 현재 실내 온도와 유사한 온도일 테지만, 그래도 검증을 위해 실제로 와인랙에서 보관하던 와인을 한 병 열어보았다. 실내 온도는 막 30°C를 넘어선 상황이었고, 와인을 오픈하기 직전에 희망 온도를 25°C로 맞추어 에어컨을 켰다.

마트에서 산 요리용 온도계로 잰 와인의 온도는 자그마치 29.1°C. 햇빛이 들지않는 그늘진 곳에 보관된 와인이었지만 실내온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대로 마신다면 와인의 제맛을 느끼지 못한 채 애꿎은 생산자와 판매자만 욕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대로 즐기려면 권장 음용온도인 17-19°C 까지 온도를 낮추는 것이 좋다.

 

가장 빨리 온도를 낮추는 방법은 얼음과 물을 넣은 아이스 버킷이다.

와인 전문가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가 쓴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에 따르면, 아이스 버킷은 처음 20분 동안 매 2분마다 약 1°C의 온도를 낮춘다. 대략 20-24분 정도면 원하는 온도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스버킷이 없거나 나처럼 아이스 버킷 준비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면 손쉽게 냉장고를 이용해도 된다.

냉동실에 와인을 넣으면 4-5분에 1°C 정도 온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50분 남짓이면 원하는 온도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그러나 깜빡하고 와인을 제때 꺼내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소중한 와인이 꽁꽁 얼어버 린다는 단점이 있으니 주의할 것.

 

냉동실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타이머 를 맞추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냉장실을 이용하면 속도는 좀 느리지만 안전하게 온도를 낮출 수 있다. 그렇다면 냉장실에서 원하는 온도를 얻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시원하게 즐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16°C정도까지 온도를 낮춰보기로 했다.

위에서오픈한 와인을 3°C로 설정된 냉장실에 넣어 5분마다 변화하는 온도를 확인해 봤더니 아래와 같았다.

 

정밀하지 않은 가정용 온도계이고 온도 확인을 위해 5분마다 냉장고 문을 여닫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어쨌거나 대략 1시간 45분 만에 원하는 온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번처럼 냉장고 문을 빈번하게 여닫지는 않을 테니 좀 더 빠른 칠링이 가능할 것이다.

대략 15분에 2°C 정도 온도를 낮출 수 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저녁 식사에 곁들일 와인이라면 4시 반 쯤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된다.

 

반대로 냉장고 에 보관하던 차가운 레드 와인의 온도를 적정 음용 온도로 올리려면 얼마나 걸릴까?

같은 와인을 잘 막아 냉장고에 넣었다가 5시간 후에 꺼냈을 때 와인의 온도는 6.4°C였다. 이후 25°C의 실내에서 5분 단위로 와인의 온도를 쟀는데 35분 만에 원하는 온도(16.4°C)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냉장 보관하던 레드 와인은 마시기 30분 전에 꺼내면 적당한 온도가 된다는 얘기다.

집안에 보관하던 레드 와인, 온도만 잘 맞춰도 맛이 달라진다. 한여름에 실온에 방치돼 있던 레드 와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장고를 이용하면 쉽게 온도를 맞출 수 있으니 적극적인 활용을 권한다.

 

부디, 레드 와인에게도 칠링을 허하라.

 

김윤석 기자

김윤석 와인전문기자는 2010년 객원기자 1기로 와인21에 합류했다. 2008년 WSET Advanced Certificate를 취득했으며, 2013년 서울국제주류 박람회 '한국와인시장리포트 세미나'에서 한국 와인 시장 현황에 대해 발표했다. 와인을 둘러싼 사람과 문화, 제도 안에서 와인을 이해하려는 글을 쓴다. 가끔은 맥주, 위스키 등 다른 주류에 한눈을 팔기도 한다. 티스토리에 '개인척한고냥이의 와인 저장고'라는 캐주얼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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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와인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나는 간혹 점수제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는다. 특히 보디감이라는 부분에서 좀 혼란스러워 하는데 가령 보디감 1~5점 이렇게 되어 있다면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할까?

 만약이 기준대로라면 소비뇽 블랑은 0점이 되어야 할 것이고 호주의 진한 쉬라즈는 5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즉, 종류와 품종적 특성을 따져야 하는 관점에서 보디감이라는 것은 그렇게 좋은 평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와인을 바라볼 때 이를 좀더 세분화해서 구조감, 보디감, 밀도감 관점에서 나누어서 접근하는데 다음과 같은 주관적이고 정성적인 기준으로 바라본다.(즉,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구조감: 포도 알갱이 하나를 포도송이에서 뜯어낸다고 생각을 해 보자. 그리고 그 연결되었던 부분을 생각해보자. 집에서 포도를 먹다 보면 그 뜯어진 곳이 매끈한 포도도 있고, 껍질이 진무른 것도 있고간혹 이물질이 묻어있는 것도있다. 이 부위가 매끈하게 뜯어지는 포도는 탱글탱글하며 씹을 때에도 껍질 부위가 단단히 지탱한다. 이런 외연적인 특징을 구조감이 전해준다. 와인의 구조감을 이야기 할 때 혹자는 품종간의 밸런스, 시음 적기의 안정감 등도 이야기하나 나는 그포도가 얼마나 온전하게 수확되고 관리가 되었는지에 따라서 보는 측면이 있다.


보디감: 말 그대로 묵직한 느낌이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인데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에서 많이 관찰될 수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두껍냐 두껍지 않냐 하는 느낌이다. 소비뇽 블랑의 경우에는 극도로 얇다. 너무나 하늘거린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호주의 진한 쉬라즈(요즘은 많지 않지만)의 경우 엄청나게 보디감이 강하다. 그런데 이 보디감이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이 기준대로라면 소비뇽 블랑의 점수는 형편없이 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도감: 꽤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나 보디감이 있다고 밀도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 위에 보디감이라는 강철배가 떠 있는데 그 아래는 공허하고 싱거운 느낌을 주는 경우를 들수있다. 이 밀도감을 비교하는 좋은 방법은 고가 와인과 저가 와인을 비교해서 시음해보는 것이다. 같은 포도원은 비슷한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포도원의 것으로 나누어서 해 본다. 밀도감이 너무 강하면 와인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어린 와인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밀도감이 과하면 아로마의 힘이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감이 좋은 화이트가 밀도감마저 좋아버리면 아로마 를 피우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 온도를 좀 올리거나 브리딩도 많이 해야 한다. 트레이드 오프가 있는 개념이 밀도감이다.

이 세 개념으로 몇몇 포도품종이나 와인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비욘디 산띠 같은 클래식 스타일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를 들 수 있다. 비욘디 산띠(Biondi Santi)의 경우 색상은 희멀건 투명한 빛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원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색이 그렇다. 아로마는 섬세하다. 그러나 입안에 넣는 순간 미디엄라이트 보디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구조감과 밀도감을 보여준다. 밀도감이 강하다 보니 브리딩이나 디켄팅을 6시간 이상 해 주어야 아로마가 피어난다. 그러나 보디감은 미디엄 라이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운 아로마가 피어날 것이다.


구조감을 잘 보기 위해서는 잘 만든 리슬링이 좋다. 분명히 가녀리고 알콜도 세지 않는데 숙성은 20~30년은 우습게 넘기는 리슬링이 부지기수다. 그 와인들은 분명히 생동감이 있다. 그러나 보디감은 매우 낮다. 밀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로마는 화사하고 기분이 좋다. 부족한 산도 부분은 당도가 어느정도 지탱한다. (물론 잘 만든 포도원은 대단한 산도와 당도의 밸런스를 보여준다.) 특급 소비뇽 블랑도 구조감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된다. 특히 후리울리 지역의 소비뇽 블랑을 마셔보면 정말로 깊이 있는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래전 수입 되었던 론코 델 녜미즈(Ronco del Gnemiz)와 같은 부띠끄 포도원들의 와인들이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오래전에 과일 폭탄이라는 개념의 와인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평론가들 사이에도 말들이 많았다. 이 와인들은 보디감과 밀도감이 매우 강해서 그 밀도감을 비집고 터져나오는 과실의 느낌을 많이 주었다. 주로 미국의 컬트 와인을 시도하는 신생 포도원들, 그리고 호주에 서 뜨거운 태양 아래 최대의 응집도를 끌어내는 포도원들이었다. 그러나 그 와인들의 구조감은 많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도 고가의 와인들 중에는 보디감과 밀도감은 있으나 구조감은 많이 부족한 와인들이 많 다. 이런 와인들은 브리딩 후에 뭔가 보여줄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구조감이 약할 때에는 복합미가 떨어질 때도많다. 그래서 브리딩을 해도 계속 같은 향만 난다. 좋은 고급 와인은 브리딩 할수록 계속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만큼 구조에 여러 층위(layer)가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에 많이 각광받고 있는 내추럴의 경우에는 보디감과 밀도감은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 다.인위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도 자체의 자생력이 있어서 구조감은 상당히 좋다. 그래서 입 안에 들어가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어느 한쪽을 강화하기 위한 인위적 노력이 잘 안느껴진다. 그래야 정상일 것이다.


 종합해서 살펴본다면 저 각각의 요인에 다시 산도, 당도, 타닌, 아로마, 피니시라는 요인들이 엮여서 다중 복합 방정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밀도감있는 타닌과 구조감있는 타닌은 다르며, 밀도감있는산도와 보디감있는 산도, 구조감있는 산도 역시 달라야 할 것이다. 이 각각의 요소는 서로간에 영향을 주어 매우 묘한 느낌의 경험을 와인 애호가들에게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 와인을 마실 때 이러한 느낌을 조금씩 느껴본다면 좀 더 와인 생활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휘웅 칼럼니스트

2005년 이후 네이버 와인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온라인 닉네임 ‘웅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9천 건에 가까운 자체 작성 시음노트를 보유하고 있으 며,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김준철와 인스쿨에서 마스터 과정과 양조학 과정을 수료하 였다.IT분야전문직업을가지고있으며와인분 야 저술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13년부터 연 초에 한국수입와인시장분석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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